법륜스님의 즉문즉설
나는 요즈음 학교 도서관에 갈 때 팟캐스트 ‘법륜 스님의 즉문즉설’을 즐겨 듣는다.
‘법륜스님의 즉문즉설’은 법륜스님이 한국과 세계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시면서 강연하시는 내용이다. 여기서 특이한 점은, 스님이 일방적으로 자신의 생각과 견해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항상 스님은 질문자의 질문을 먼저 듣고 그것에 대한 답변을 하신다.
질문의 내용을 조금 발췌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부모님과의 사이가 좋지 않다. 어떻게 해야하는가?
아이가 공부를 안하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
내가 화를 잘 참지 못한다. 어떻게 해야하는가?
시어머니와의 사이가 좋지 않은데 어떻게 해야하는가?
이 세상은 올바르게 사는 사람이 더 손해보는 것 같다.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에피소드 하나 하나가 5~20분 사이로 생각보다 길지도 않고 정말 나도 한 번쯤은 생각해봤을 그런 문제들이며 현실과 동떨어지지 않은것 같아서 내용이 공감도 되고 참 재미있다.
하지만 즉문즉설의 백미는 역시 법륜스님의 명쾌한 대답이다.
즉문즉설을 관통하는 세가지 사고방식
스님의 즉설을 듣고 있으면 언제나 세가지 원칙이 있다는 것을 느낀다.
모든 문제는 ‘나’에게 있다. 따라서 문제의 해결의 열쇠 역시 ‘나’에게 있다.
나는 나고 너는 너. 내 마음대로 타인을 변화시키려 하지마라.
기대하지 마라.
모든 문제는 ‘나’에게 있다.
즉문즉설에서 질문자는 간혹 ‘~때문에 화가나거나 힘들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를 고쳐야 하는가?’ 와 같은 질문을 할 때가 있다.
그럴때 스님은 항상 모든 문제의 핵심은 바로 나 자신에게 있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내가 어떠한 마음가짐을 가지느냐에 따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하신다.
예를 들어, 남편이 매일 술을 마시고 들어와 화가났을 경우, 스님은 다음과 같이 조언하신다.
‘매일아침 하루 빠짐없이 매일 우리 남편 술을 꼭 먹고 들어오게 해주십시오’를 생각하며 108배를 하시죠.
그리고 오히려 술을 마시고 오지 않을 경우는 술을 준비해서 그 기도를 이루도록 해야합니다.
여기서 포인트는 마음에서 우러나와서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3년 정도 후에는 남편의 술주정이 줄어들고 거짓말 같이 술을 마시지 않게 된다는 것이며, 자기자신의 생활이 술에 대한 스트레스가 사라짐과 동시에 보다 편해진다는 것이다.
나는 이 조언이 스님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삶의 지혜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지혜 중 하나는, 스트레스의 원인을 자기자신의 마음 으로 지목하신 것이다.
질문자는 남편이 술을 마시는 행위를 자기자신을 스트레스 받게하는 요소로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스님은 술을 마시는 행위를 스트레스의 요소가 아닌, 긍정적인 요소 로 발상의 전환을 제안한다.
이것이 사고의 역전이자 즉문즉설의 백미.
나는 나고 너는 너. 내 마음대로 타인을 변화시키려 하지마라.
또한 스님의 말씀에는 또 다른 지혜의 아름다움이 숨겨져 있는데 그것은 다름아닌 타인의 문제와 나와의 분리 다.
질문자는 분명 남편을 변화시킬 방법을 스님에게 묻고싶었겠지만, 스님은 ‘술을 마시는 일’자체를 내가 원하는대로 변화시키는 것은 욕심이라고 하신다.
사실 우리의 삶에서 타인의 행동을 긍정적인 방향이든 부정적인 방향이든 변화시키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그 사람은 내 노력을 티끌로도 보지 않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따라서 만일 내가 타인을 변화시키는 것이 나의 과제이자 숙명으로 여기면 그 짐으로 인한 무게가 내 삶 자체를 짓누를 것이다.
그래서 스님은 애초에 타인의 짐을 자신이 짊어질 필요가 없다 고 역설하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와 같은 마음가짐은 타인은 타인이 그러한 행동을 하는 자유가 있다는 것을 존중하는 동시에 나 자신의 짐도 덜어버리는 것이다.
기대하지 마라.
마지막으로 스님은 ‘기대하지 말라’고 충고하신다.
대개 사람들은 기도를 하면서 자신을 둘러싼 환경이 변화가 되길 기대한다.
하지만, 기대를 하므로써 우리는 ‘기대’라는 이름의 새로운 짐을 짊어지게 되는 것이다.
만일 내 기대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 기대라는 짐은 또다시 무거운 고뇌가 되어 나의 어깨를 누를것이다.
그래서 스님은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 즉, 어떠한 행위의 결과에서 아무런 기대를 하지 않는 마음의 중요성을 강조하신다. 중요한 것은 그 행위를 하는 것이지 행위의 결과는 자신의 마음과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프로그래밍과 불교
법륜스님의 위의 세가지 원칙과 더 나아가 불교의 가르침은 프로그래밍의 세상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다음과 같이 생각해보자.
가장 먼저, ‘나’는 나를 둘러싼 세상의 환경적 요소를 인수로서 받는 함수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함수 내부에는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 즉. 세상을 바라보는 알고리즘이 들어있는것이다.
이를 코드화한다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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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은 보통 나를 둘러싼 환경인수들을 탓하며 무리하게 환경을 바꾸려고 한다.
하지만 법륜스님을 비롯한 불교의 가르침은 내가 제어할 수 없는 환경 인수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닌,
- 내가 어떻게 환경을 바라보는가?
- 내가 어떻게 나에게 주어진 환경을 활용하는가?
와 같은 ‘나’의 마음에 좋은 알고리즘을 만드려는 구상에 초점을 맞춘다.
사실 프로그래밍에서도 그렇듯이 함수의 output을 환경인수를 간단히 변경하는게 언뜻 보면 쉬울 것 같아보인다.
하지만 또 우리가 평소 생활하면서 느끼듯이
타인을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쉽지 않다. 또한, 타인을 변화시켰을때는 반드시 부작용이 따른다.
하지만 그에 반하여, 잘 정의된 함수는 인수에 object가 오든, string이 오든 어떠한 자료구조, 어떠한 데이터 형태가 input으로 들어와도 원하는 output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떠한 일이 내가 바라는 바 처럼 되길 바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일이 닥치더라도 흔들리지 않는 그런 마음을 갖게 될 수 있도록 기도해야한다.
나는 어떠한 input이 오든 흔들리지 않고 나만의 신념을 지킬 수 있는 output을 낼 수 있는 그런 하나의 함수가 되고 싶다.
그래서 이제 나는 나에게 묻고자 한다. ‘나는 어떤 함수인가?’ ‘나의 함수는 환경인수를 제어하려 하는가, 아니면 내 마음의 좋은 알고리즘을 만드려하는가?’
나는 종교를 믿지 않지만 어느종교이든 아름다운 말과 생각에는 그 특유의 향기가 있는 것을 느낀다.
마치, 절차지향적, 객체지향, 함수형, 선언형 프로그래밍 등등.. 각각의 프로그래밍 스타일이 고유의 매력을 뽑내는 것과 같이.
또한 각각의 프로그래밍 스타일도 궁극적으로 ‘좋은 프로그램을 작성한다.’ 라는 공통된 궁극적인 지향점 있듯이, 모든 종교도 ‘향기롭고 아름다운 삶을 산다’ 라는 공통의 궁극적인 지향점 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잘 생각해보면 세상을 살아가는 이치가 프로그래밍에도 곳곳에 스며들어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작지만 나의 배움을 바탕으로 세상을 이런식으로 나만의 방식으로 의미부여를 해가는것은 참 재밌다.
같은 세상이라도 나에게는 조금 더 특별해 보이니까.
항상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법륜스님.